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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지현 아르스비테 발행인 | 중앙 Sunday 제550호

삶의 방식 스물일곱 번째 질문 나는 제대로 된 질문을 하고 있는가

가끔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가 “아하”하면서 작은 깨달음을 얻을 때가 있다. 내가 던진 질문에 휘말리지 않고, 그 프레임을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각도에서 문제의 핵심을 짚어줄 때 그렇다. 치즈를 찾아가는 생쥐처럼 미로 속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치즈는 미로 밖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아르스비테’를 만들기 위해 만난 한 티베트인 린포체(티베트어로 소중한 사람을 뜻하며, 영적 지도자들에게 주어지는 호칭)와의 짧은 대화에서 그런 신선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린포체와 불교식 수행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주의 이치를 깨우쳤다는 붓다는 왜 나이 팔십에 식중독이라 는 하찮은 병으로 세상을 떴느냐고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대단한 수행을 했고, 대단한 깨달음을 얻었으면 식중독 정도는 가볍게 넘어갈 수 있을 정도의 도력을 갖춰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린포체가 말했다. 수행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만일 그 목적이 장수하는 것이라면, 목적에 부합하는 수행을 하면 된다. 그러나 만일 붓다가 삶과 세상에 대해 깨우친 것을 알고 싶다면 붓다와 같은 수행을 하는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무병장수가 아니다. 불교에서 몸은 호텔과 같은 것이다. 체크인해서 필요한 만큼 머물다가 때가 되면 체크아웃하고 또 다른 길을 가는 것이다. 너무나 단순한 대답이었지만, 나는 순간 내 질문의 방향이 어리석었음을 깨달았다.

또 다른 비슷한 이야기다. 세계적인 정보기술(IT)업체의 잘 나가는 중역이 어처구니없는 의료사고로 아들을 잃은 뒤 행복을 찾는 방법에 대해 책을 쓰고 한국을 방문해 강연했다. 그는 숨진 아들과 함께 비디오게임을 즐겨 했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게임을 하는 방식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는 매 단계마다 가장 효율적이고 피해가 적은 방법으로 적들을 물리치고 빠른 속도로 다음 단계로 올라가려고 했다. 그런 그를 아들이 의아하게 바라봤다. 그는 이게 게임의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러면 게임은 끝나잖아요. 게임을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가요”라고 아들이 반문했다. 이 말은 그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고 한다. 그의 아들은 각 단계에서 벌어지는 게임의 다양한 상황들을 모두 경험해 보고 만끽했다. 어려운 적들이 있을수록 일부러 그 상황 속에 뛰어 들어 말 그대로 게임을 하듯이 즐겁게 부딪쳤다. 자신 앞에 주어진 모든 상황을 겪어 본 그는 게임의 높은 단계로 올라갔을 때 더욱 어려운 도전들을 해결하는 능력이 커져 있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질문이다. 무엇 때문에 게임을 하는 것인가? 그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게임을 헤쳐 나가는 방법은 크게 달라진다.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마치 숙제를 하듯 남보다 크게 그리고 빨리 성취를 하려 할 수도 있고, 삶이 던지는 다양한 굴곡들과 질감들을 게임하듯 음미하며 삶을 담는 그릇을 키워 나갈 수도 있다. 전자에게 삶은 문제의 연속이지만, 후자에게 삶은 무궁무진한 소재를 제공하는 배움의 경험이다. 미국의 작가이자 시러큐스대학의 교수인 조지 손더스는 그가 한 졸업식 축사에서 성취지향적인 삶은 끝이 없어 마치 등산을 하는 도중에도 점점 높아지는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매 순간을 온전하게 살기 위해 내 삶에 많은 변화를 줬다고 생각했는 데도, 나는 여전히 다음 단계로 빨리 가기 위해 헉헉거리고 있음을 발견할 때가 많다. 그래서 나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본다. 나는 제대로 된 질문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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