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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지현 <아르스비테> 발행인 | 중앙 Sunday 제490호

삶의 방식 열두 번째 질문, 지금 이 순간을 산다는 것은

‘나무의 지혜’를 다룬 <아르스비테> 여름호의 마감이 끝나고 그 다음 호의 주제에 대한 회의가 시작되었다. 에디터들과 이런저런 주제들을 논의하다가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사는 것을 가로막는 것들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관심이 모아졌다.

행복한 삶에 대한 책과 가르침들은 모두 지금 이 순간에 머물라고 한다. 지나간 과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라고. 수천 년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그 중요성을 수도 없이 반복해서 알려줬음에도 불구하고 왜 지금 이 순간의 삶에 집중하는 것은 그리도 어려울까.

재미있는 이야기가 한 편 떠오른다. 마을에 물난리가 나자 한 남자가 신에게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는 하늘이 열리며 신의 큰 손이 내려와 자신을 구해주는 장면을 머릿속에 그렸다. 그의 이웃들이 차를 몰고 와 안전한 곳으로 같이 가자고 했지만 그는 신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며 꼼짝하지 않았다. 물은 점점 차올랐고 그는 지붕 위로 피했다. 보트에 탄 또 다른 사람들이 다가와서 도와주려 했지만, 역시 거절했다. 수위는 계속 높아졌다. 지나가던 헬리콥터가 남자에게 사다리를 내려주었지만, 그는 신의 손길만을 기다리며 헬리콥터를 돌려보냈다. 집은 결국 물에 가라앉았고, 남자는 죽었다.

남자가 천국에서 신을 만났을 때 따졌다. “구원해 줄 거라고 믿었는데, 왜 죽게 내버려뒀나요?” 신은 말했다. “난 너에게 차와 보트와 헬리콥터를 보내주었다. 더 무엇을 해주어야 한단 말인가?”

구원이든, 행복이든 우리가 원하는 삶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것은 우리 머릿속에 있는 작고 좁은 기준들이다. 이들에 시야가 가려 우리는 자신 앞에 주어진 기회와 가능성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내가 가진 기준대로 상황을 재단하고 판단한다. 그 기준들이 집착도 만들어내고 두려움도 만들어내 나를 현재에 머물지 못하게 한다. 목표지향적인 현대인은 특히 어떠한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끊임없이 계산해서 유리하다고 생각되는 선택만 하려고 한다. 그러나 살면서 수도 없이 경험하지만, 결과는 머리로 생각한 대로 펼쳐지지 않고, 유불리는 한참 후에 그 시간을 돌아볼 때서야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오죽하면 새옹지마라는 고사성어가 생겼을까.

매 순간을 온전하게 느끼고 산다는 것은 그 시간을 생각과 행동으로 빽빽이 채우는 것과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삶 그 자체, 그 생생함을 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편협한 기준과 작은 계산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나무의 지혜’를 다루기 위해 나무 전문가들의 글을 읽고 연구하면서 자연이 보여주는 내려놓음에 대해 새삼 느낀 바가 많았다. 나무는 매년 죽어야 새로 살 수 있다고 한다. 그 해에 새로 태어난 잎과 가지만 살아있을 뿐, 그 전 해까지 키운 몸통은 죽는다. 대신 몸통은 나무 전체의 생존을 위해 중력과 환경의 변화를 버텨내고 물을 끌어올린다. 새로운 한 해, 또다시 푸르게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나무는 끊임없이 자기를 버리는 것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매 순간 온전하고 생생하게 존재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나’가 사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와 공명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비어있어야 한다. 비어있는 것만이 같이 울릴 수 있다. 작은 나에 갇혀 수많은 기준들로 나를 채우고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동안, 신의 손길은 여러 차례 내 앞을 지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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