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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지현 <아르스비테> 발행인 | 중앙 Sunday 제478호

삶의 방식 아홉 번째 질문, 좋은 운명, 나쁜 운명이 있을까

지난달 삶의 리듬에 대해 쓴 나의 칼럼을 보고 동양학을 연구하는 학자 한 분이 문자를 보내주셨다. 주자학에서는 각 개인의 ‘기질’이 그 사람의 삶의 리듬을 형성하며, 인간의 과제는 이 기질의 ‘순화’ 와 ‘교정’으로, 이 과정에 있어 관건은 ‘세계의 질서와 나 자신에 대한 이해’라는 설명이었다.

기질의 순화와 교정이라는 표현을 읽는 순간 나의 마음은 10대의 기억으로 돌아갔다. 어린 시절 나는 ‘교정’에 그야말로 관심이 많았다. 일찍부터 세상을 움직이는 이치, 자신의 운명을 탐구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아마도 어느 순간 품게 된 “나는 왜 이렇게 만들어졌을까”라는 작은 질문일 것이다. 나의 하루 하루는 불완전하기 그지 없는데, 공자가 말하는 지천명(知天命)하고 이순(耳順)하는 경지에 이르려면 도대체 나는 어떤 수양을 통해 어떻게 개선되어야 하는것일까.

자신을 완성하기 위한 ‘교정’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세속적으로 더 잘 살기 위해 달라지고 변해야 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듣는다. 집·학교·직장에서도. 서점은 매일 행복해지는 지름길, 자기를 계발하는 새로운 방법을 가르치는 책들로 넘친다. 그런데 그 기준은 어디 있으며 무엇이 정답일까.

나이를 먹어가면서 좋은 점이 있다면, 세계의 이치를 다 깨우치지는 못 하더라도 ‘나자신에 대한 이해’는 어렸을 때보다 깊어진다는 것이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무엇보다 삶의 경험이 한 해 두 해 축적되면서 언제부턴가 나라는 사람의 기질과 그 기질이 펼치는 삶의 리듬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그 이해는 잘 사는 삶에 대한 정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대신 나만의 유전자와 내가 처한 환경과 자연이 내게 준 성향은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나만의 삶의 패턴을 주었으며, 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체험의 기회임을 깊이 느끼게 해줬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친근감과 연민으로 이어졌다.

어렸을 때의 나는 항상 부족한 것을 채우고 고치려 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나만의 기질이 펼치는 삶의 리듬은 살면서 내게 필요한, 그리고 내가 알아야 하는 모든 것들을 경험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적절한 때가 되면. 그것이 자연의 이치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결과적으로 좋은 운명, 나쁜 운명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삶의 흐름과 살면서 배워야 할 것들이 있을 뿐. 그래도 굳이 좋은 운명을 말하자면, 그 열쇠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흐름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피하려고 하는 순간 그 자연의 흐름은 뒤죽박죽 꼬이고, 내가 깨우쳐야 하는 삶의 레슨은 순응할 때까지 몇번이고 다시 돌아오는 듯 하다.

아마도 이를 알게 되는 때가 지인이 말한 ‘세계의 질서와 나 자신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객관적인 이치에 대한 답은 가장 주관적인 데서 출발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글을 쓰는 나도 내가 말하는 바를, 나는 실천하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자신에게 닥치는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깨달은 게 있다면 왜 동서양의 철학과 종교에서 용기를 중요한 덕목으로 꼽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됐다는 것. 어쩌면 나의 글은 내가 나에게 하는 주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피하려 할 때, 두려움이 엄습할 때 흔들리는 나침반의 바늘을 다시 잡아주기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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