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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ERSHIP

Volume 04

READING SLOWLY

‹아르스비테›의 주제인 ‘좋은 삶’을 이야기하면서 한 번은 책과 함께하는 삶을 다루고싶었습니다. 내가 출판물을 만드는 사람이고, 나도 나와 같이 일하는 에디터들도 책과 글맛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3호에 담을 내용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책 그 자체보다는 읽는다는 행위, 그리고 그 과정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주제를 ‘느리고 깊게 읽기’로 정했습니다.


책은 과거와는 달리 이제 더 이상 지식과 지혜의 유일한 공급처가 아닙니다. 정보는 이미 인터넷을 통해, 특히 스마트폰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지 그때 그때 빠른 속도로 찾을 수 있게 된 지 오래입니다. 그런 만큼 천천히 읽으면서 내용을 음미하는 문화는 책의 고유 영역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느린 속도로 읽고 또 읽으면서 책에 담긴 내용을 곱씹어보는 슬로문화는 요즘에는 보기 드문 호사입니다. 초스피드의 현대사회에서 필요한 정보만 인스턴트 음식 먹듯이 검색하는 우리는 더 깊이 있게 대상을 알기 위해 시간을 할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어느 한 대상을 진정으로 알아가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장소든, 책의 내용이든. 그 대상과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되고, 좀더 깊은 맛을 알게 됩니다. 내가 이를 피부로 느끼게 된 것은 부모님과의 관계를 통해서입니다. 나이 40이 훌쩍 넘은 어느 날 문득 생각해보니 내가 태어나서 가장 오래 알았던 사람들은 바로 나의 부모였습니다. 나의 부모가 20대 때 결혼해서 나를 낳았으니 나는 그 두 분이 20대의 젊은 청춘 남녀였을 때부터 안 셈입니다. 부모가 자식인 나의 성장기를 지켜본 것뿐만 아니라 나도 20대의 두 젊은이들이 온갖 희로애락을 겪으면서 지금의 나이에 오기까지 반세기가량 그들의 삶을 지켜본 겁니다.

 

때로는 엄하고, 때로는 친구 같고, 때로는 원망스럽기도 했던 아버지, 어머니가 두 아이의 부모가 아닌 각자 한 사람으로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제가 40이 훨씬 넘어서입니다. 자신만의 꿈이 있고, 이를 위해 노력하고, 젊은 나이에 결혼과 출산, 육아를 병행하면서 성장한 두 인간이 걸어온 길이 보이고 그들이 이뤄낸 그들만의 삶에 대해 인간적으로 이해와 존경심, 연민을 느끼게 된 것이 말이죠.

 

비단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자기가 속해 있는 땅의 자연도, 풍습도, 문화도 왜 지금의 이 모습이고 질감인지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야 합니다. 마치 한권의 책을 읽고, 밑줄 쳐가면서 또 읽고, 머릿속에 상상을 해가면서 깊이 빠져드는 과정처럼. 그래서 ‹아르스비테› 3호는 뭔가에 대해 알고자 하는 깊은 관심과 그 방법론을 느리고 깊이 읽기라는 주제를 통해 조금이나마 건드려보고자 했습니다. 문학작품을 통해 인간사의 복잡한 굴곡을, 감정의 미묘한 그림자들을 접하며 삶에 대해 반추하는 일은 요즘 참 보기 드문 것 같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책상 위에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우리를 기다리는 책들에게조차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데, 살아 움직이고, 스쳐 지나가고, 언젠가는 사라질 사람들, 풍경들, 그리고 순간들과 우리는 과연 얼마나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요.

 

이 주제를 준비하면서 우리는 해외에 슬로 리딩 무브먼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사라져가는 읽기 문화를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도 발견했습니다. 뭔가 느리게,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는 관계에 대해 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민족과 문자의 특별한 관계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됐습니다. 우리나라가 유네스코에 등재된 기록문화 유산은 세계 5위라고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도 우리나라에 있고(무구정광대다라니경),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직지심체요결)도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이뿐 아니라 불교 가르침을 집대성한 팔만대장경이 1천 년 가까이 보존되어 있고, 우리 글에 대한 필요와 문제의식을 통해 한글이라는 고유문자를 만들어냈습니다. 선조들의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문자 DNA가 고스란히 드러난 우리나라만의 글그림인 ‘문자도’에 대한 내용도 다뤄봤습니다.


‹아르스비테›가 처음 발간되었을 때 한 지인이 ‘사람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모든 것과 경쟁하는 책’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이 맞습니다. ‹아르스비테›는 그 종이의 무게 때문에라도 앉아서 읽어야 합니다. 또 온라인에 내용이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책 그 자체를 봐야 합니다. 3호의 주제인 시간을 들여 느리고 깊이 읽기는 바로 ‹아르스비테›에 담고자 하는 우리의 가치입니다. 그래서 느리게 읽기, 그리고 무엇인가를 깊이 알기를 다룬 3호를 만드는 과정은 특별하고도 행복한 여정이었습니다.

 

 

200 pages

KRW 1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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