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ume 08
Rest
<아르스비테> 8호의 주제 ‘휴식'은 7호 작업을 하던 중에 자연스럽게 정해졌습니다. 7호 편집 작업을 하기 위해 책상 앞에 앉기까지 너무나도 바쁜 시간들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에 내면세계와 과학을 주제로 하는 해외 콘퍼런스 시리즈와 명상 모임을 기획하느라 출장과 회의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아르스비테>를 처음 발행할 때부터 ‘삶의 방식'에 관심 있는 분들과 이를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꿈꾼 터라 콘퍼런스와 명상모임의 성공적인 론칭은 큰 보람을 느끼게 해줬습니다.
그러나 해외 출장 사이사이 밤낮없이 글을 읽고 이미지들을 보고 에디터와 회의를 하며 숨 가쁘게 7호를 마무리하는 동안 <아르스비테>를 처음 기획했을 때의 초심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르스비테>는 손으로 종이의 질감을 느끼며, 시간을 들여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을 생각해보는, 의미 있는 휴식과 같은 책이라는 콘셉트로 출발했습니다. 특별히 정성스레 고른 종이를 사용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삶의 깊이와 지혜를 추구하는 삶, 맑게 깨어 있는 삶, 허덕이며 떠밀려 살지 않는 삶을 독자들과 같이 논하기를 원했습니다.
<아르스비테>를 만드는 과정에도 그러한 에너지를 불어넣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매호 충분한 여백과 쉬어 가는 리듬을 담고, <아르스비테>를 만드는 우리 스스로도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와 속도에 맞게 작업하려고 했습니다. <아르스비테> 1호를 발행했을 때 한 해외 독자가 제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아르스비테>의 페이지를 넘기면서 젠 가든(Zen Garden)을 거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그래서 바쁜 일정을 소화하며 책을 만들면서 자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다가 다시 이렇게 숨 가쁜 삶으로 돌아가게 된 걸까요?
매 순간 깨어 있고 고요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며, 현 상황에 집중해 사는 것이 왜 그렇게도 어려운 일일까요? 조금만 방심하면 처리해야 할 일들이 쌓여 순식간에 쫓기듯 살게 됩니다. 일상이 바쁘다고 마음조차 바빠지는 것은 삶 자체의 속성일까요 아니면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하려는 욕심 때문일까요? 요즘 유행하는 일과 삶의 균형(work life balance)의 문제일까요? 아니면 한 호흡, 한 호흡 의식적으로 살기에는 현대인에게 휴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걸까요? 휴식이 부족하다면 물리적인 휴식이 더 필요할까요, 아니면 다른 차원의 휴식이 필요할까요?
휴식을 이해하고자 하는 <아르스비테> 8호의 작업은 이러한 질문들로 시작되었습니다. 8호에서 관심을 갖는 휴식이란,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러 갈래로 분산된 마음이 아니라 인생을 주도하는 중심 잡힌 마음, 그리고 여유를 가능하게 해주는 그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8호를 제작하는 과정 자체도 실험 대상이 되었습니다. 마감에 쫓기지 않고 8호의 내용들이 유기적인 하나로 모아질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아르스비테> 8호의 1부는 휴식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로 시작합니다. 현대인들은 휴식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고, 실제로 어떻게 쉬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휴식과 창의성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들이 나오면서 선진국의 기업들은 휴식을 근무시간 안에 포함시키는 새로운 근무 환경을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노동하는 시간을 줄여야만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이미 오래전에 주장한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유명한 글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발췌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 농사에 휴경기간이 있듯 인생에도 충분히 멈추고 숨을 고르는 시간이 있어야 새로운 가능성들이 발효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1부에서 물리적인 휴식, 일과 휴식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뤘다면 2부에서는 내면이 평화로워야만 가능한 휴식, 어떻게 보면 좀 더 근본적인 휴식에 대해 다뤘습니다. 이에 대한 관심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되기도 했습니다. 8호 작업에 필요한 시간을 충분히 갖기로 결정하면 휴식과 일의 황금 비율을 체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더 많은 시간은 오히려 또 다른 많은 일들과 상황들을 가져왔습니다. 특히 이 기간에 해외로 자리를 옮겨 새로운 프로젝트들을 시작하다 보니 매일매일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로 넘쳤습니다. 그러나 늘어난 일이나 육체적인 피로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사람을 지치게 하는 것은 인간관계에 얽힌 복잡한 감정들이라는 점에 많은 분들이 공감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살아 있어 끊임없이 사물에 반응하기 때문에 평화로운 본성에 고정할 수 없다는 한 중국 유학자의 문제 제기가 와닿는 대목입니다. 복잡한 인간 사회에서 어떻게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지는 오래전부터 제기되어온 숙제입니다. 이에 대해 중세시대 서양의 수도승은 번잡한 사회를 떠나 조용히 수도할 것을 권하고, 또 다른 필자는 속세 안에서 진정한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는 중국의 한 고전의 가르침을 전합니다. 명상과 시 속에 담긴 휴식도 2부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3부는 2부에서 제기된 문제의식을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룹니다. 최근 뇌과학자들은 오랫동안 명상을 해온 사람들의 뇌가 일반인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어느 날 머릿속 잡념이 말끔히 사라지면서 머리가 고요해지는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체험담은 진정한 평화, 행복에 이르는 길이 노력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부정적인 생각도, 에너지를 잡아먹는 집착과 잡념도 모두 사라진 상태로 바라보는 삶은 그 전과 얼마나 다를까요? 그러면 지금 인류가 직면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길도 열리지 않을까요? 외부의 변화는 결국 내면의 변화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럼 우리는 왜 그렇게 진화하지 않았는지 뇌과학자와 나눈 대화도 3부에 실려 있습니다.
<아르스비테> 8호는 충분히 시간을 갖는 것뿐 아니라 다른 면에서도 새로운 시도를 해봤습니다. 지금까지의 <아르스비테>는 다양한 예술가들의 작품과 사진을 글과 함께 실었다면, 현각 스님의 사진들(김용호 작가 촬영)을 제외한 8호의 이미지들은 모두 문덕관 작가 한 사람의 작품입니다. 휴식이 주제인 8호는 다양성보다는 한 사람의 시각과 취향으로 보다 고요한 분위기를 담고자 했습니다. <아르스비테>의 새로운 시도가 좀 더 풍성하고 깊은 휴식을 느끼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이제 또 겨울입니다. 겨울은 다음의 도약을 위한 휴식의 계절입니다. 8호를 제작하는 과정이 저희에게 휴식에 대한 하나의 긴 실험이었던 것처럼, 이 겨울이 여러분에게도 진정한 휴식을 누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지현 J. Julianne Lee
Publisher & Editor-in-Chi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