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ume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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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king Back
어린 시절 나는 또래에 비해 말과 글을 비교적 일찍 깨우쳤습니다. 덕분에 책을 일찍 손에 들었고,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하며 이야기 속 세상에 머무는 시간을 좋아했습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어린이 문고 시리즈, 이야기 역사책, 어린이 백과사전 등이 쏟아져 나와서 읽을거리는 늘 풍족했습니다. 특히 총천연색 사진과 함께 세상의 모든 것을 알려주는 듯했던 어린이 백과사전은 무척 신기해서 소설책 읽듯이 전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한 기억이 납니다.
부모님을 따라 가게 된 미국에서도 책 읽기는 내 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우리 식구는 주말에 딱히 할 일이 없으면 서점에 가곤 했습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도 많지만 당시에는 난생처음 본 미국의 대형 서점은 물론 동네 책방, 마을 도서관도 눈이 휘둥그레 질 정도로 문화적 충격이었습니다. 줄줄이 늘어선 책장에 꽂힌 다채로운 색깔의 책들을 보면 지적 풍요로움과 여유가 흘러넘치는 별천지에 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식구는 서점 여기저기에 흩어져 앉아 이 책, 저 책을 읽다 접다 하는 호사를 마음껏 누렸습니다.
서점에 가면 항상 아버지는 내가 읽을 책을 한두 권 골라서 사주셨는데, 그 책들은 대부분 고전 명작들로, 초등학생인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어려운 작품들이었습니다. 영어를 갓 익히던 나로서는 내용은 물론 옛날식 문법과 표현을 해석하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워 머리가 아팠습니다. 읽는 속도는 느리기 짝이 없었고, 읽어야 할 책들은 쌓여갔습니다. 그럴 때면 아버지가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당장 이해가 안 되더라도 일단 끝까지 다 읽어보라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읽은 책들은 자기도 모르는 새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 훗날 어른이 되었을 때 그 의미가 새삼 와닿아 다시 그 책을 찾고 싶은 때가 올 거라며.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고, 다양한 상황 속에서 때로는 기쁘다가 때로는 좌절하는 나만의 인생을 경험하면서 나는 오래전 아버지가 권했던 책들을 가끔 떠올렸습니다. 주인공이 겪은 상황이 지금 내가 처한 이런 상황인가? 저자는 과연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을까? 그리고 나는 먼지가 쌓여 표지가 바랜 책들을 다시 펼쳤습니다.
어릴 때는 알 수 없던 것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이해되는 것은 세월이 주는 선물입니다. 생생한 삶의 현장에서 쌓인 경험들은 삶의 복잡다단한 장면들을 나만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만들어줍니다. 그 눈은 인간이 빚어내는 감정과 상황들의 부딪힘, 꼬임들을 마치 소설 속 이야기를 읽는 것처럼 미세하게 관찰하고 알아차리면서도, 동시에 흘러 지나간 세월만큼의 거리를 망원렌즈로 보는 것처럼 멀리서 관망하게 해줍니다. 그래서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내린 개별적 선택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적어도 작가가 그 작품에서 제기하는, 삶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에는 공감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나 자신의 이야기이거나 아니면 내 주변의 누군가는 부딪히고 고민했을 삶의 문제들임을 이제는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살아본 사람의 지혜가 있습니다.
이른 나이 때부터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인가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던 내가 고전 작품 속 주인공들의 삶에 몰입하고, 성인군자들이 썼다는 책들을 찾아 읽은 것은 먼저 산 사람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삶의 비밀이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 번뿐인 인생을 실패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강했던 젊은 시기에는 어떻게 해서든 정답을 찾아내려고 조바심을 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현명한 사람들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이제는 한 가지 쉬운 답 같은 것은 없다는 것쯤은 아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100세 가까이 장수를 누리면서 자신의 인생과 주변인들과의 관계를 돌아본 한 노철학자 의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살아본’ 사람들의 지혜에 대한 궁금증이 꿈틀거렸습니다. 한 세기 가까이 살면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들은 삶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 그들은 궁극적으로 무엇이 중요하다고 느낄까?
반드시 오래 살아야만 삶의 지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예기치 못한 불행을 접하거나 죽음과 직면한 사람은 지금까지 자기가 알던 세상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한다고 합니다. 이런 특별한 경험을 한 사람들은 삶의 우선순위를 새롭게 정리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서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왕자로서 부족할 것 없는 화려한 생활을 하다가 삶은 고통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 출가한 붓다, 기독교인을 박해하는 사람에서 밝은 빛에 눈이 머는 경험을 한 뒤 초기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핵심적인 인물이 된 사도 바울은 그중에서도 유명한 인물입니다. 이렇게 드라마틱한 삶의 변화를 맞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 가까이에도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래서 <아르스비테> 7호의 주제는 ‘살아보니’ 또는 ‘돌아보니’입니다. 이번 호에는 긴 삶을 살고,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 술회한, 그들이 느낀 삶의 중요한 가치들, 또는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인해 인생을 돌아보게 된 사람들이 새삼 깨달은 삶의 본질은 무엇인지, 이에 대한 이야기들을 해변가에서 조개껍데기를 줍듯 하나하나 모아보았습니 다. 톨스토이와 『성경』의 욥기 관련 글 두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지난 100년을 함께 경험한 동시대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르스비테> 7호는 3개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 ‘Death and Misfortune’은 갑자기 죽음 또는 이유 없는 비극과 조우한 사람들이 찾으려 한 삶의 의미에 대한 내용들입니다. 2부 ‘Looking Back’은 한 세기에 가까운 긴 삶을 경험한 사람들이 다양한 굴곡과 희로애락을 거치며 걸러낸 지혜를 다뤘습니다. 마지막 3부는 제목 그대로 ‘Life’s Lessons’입니다. 후회 없는 생을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들에 대한 연구 결과와 ‘살아본’ 사람들의 조언을 담았습니다. 생각과 경험이 각자 다르고 다양한 만큼 이 한 권의 출판물에서 다룬 내용은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그러나 치열하고 개성 있는 삶을 산 사람들이 인생의 일몰 시기에 스케치한 삶이라는 그림에는 왠지 모르게 공통된 내용이 적지 않습니다. 『열반경(涅槃經)』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 모두 평생 장님 코끼리 만지듯이 편협한 시야로 내 앞의 삶만 보며 아웅다웅하지만, 궁극의 어느 시점에서는 코끼리 전체가 보이는 지혜의 눈이 잠시 주어지기라도 하듯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은 예고되어 있고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다가옵니다. 그것이 무탈한 생의 끝에 자연스럽게 찾아오든, 불시에 억울하게 덮치든. 이 순간의 삶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생생하게 살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죽음을 밀어내지 않고 내 삶 안에 가까이 둬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관 속에 누워 자신의 죽음을 미리 체험해보는 프로그램, 자신이 죽었다고 상상하고 비문이나 유언장 쓰기,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의 버킷리스트 작성하기 등의 방법을 통해 많은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자기 생을 돌아보는 연습을 하고, 후회하지 않을 삶을 어떻게 살지 다시 다짐합니다. <아르스비테> 7호는 먼저 살아본 사람들이 남긴 소박하면서도 공감할 수 있는 지혜의 작은 조각들이 모인 비문이자 유언장이며 그들의 버킷 리스트입니다. 그래서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고르면서 제목 <아르스비테>처럼 ‘삶의 방식’을 다시 돌아보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Publisher & Editor-in-Chief
이 지 현 J. Julianne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