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HIP
Volume 04
CLEANING
/CLEANSING
지난해 가을, 특별한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사회 공헌 활동을 많이 하는분들과 유럽에서 만나 세상의 변화는 내면의 변화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입니다. 이분들과 며칠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이상하게도 마음이 매우 평화로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딱히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마음은 지극히 고요해졌고, 의식은 내면 깊은 곳을 향했습니다. 이 평화로움은 계속 깊어져, 일정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엔 10시간의 비행 시간 내내 깊은 명상을 하듯 고요함과 행복감에 잠겼습니다.
온몸이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함과 부드러움, 온전함으로 가득 찬 상태는 그로부터 두달 가까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동안 나는 틈만 나면 조용히 앉아서 내면을 바라보며 그 충만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내 일상에는 작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해외에서 돌아오자마자 옷장 청소를 시작해 몇 년째 바깥 구경을 못한 옷들을 정리했습니다. 신기하게 식욕도 감퇴돼 한동안 식사량이 평소의 절반 정도로 줄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아무리 피곤해도 새벽에야 잠이 드는 오래된 나쁜 잠버릇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이 또한 고쳐졌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이 특별한 시간을 통해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내면이 충만함으로 가득하면, 외적인 것에 대한 갈망이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더 많이 가지려는 소유욕도, 배불러도 계속 배를 채우는 식욕도, 쉴 새 없이 뭔가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욕심도. 가까이서 나를 지켜본 어머니는 마치 영혼이 청소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충만한 비움’의 시각에서 내 생활을 다시 돌아봤습니다. 공간도, 몸도, 마음도, 내 시간도.
생각해보면 내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내 내면의 가치와 내가 외면으로 표현하는 세계가 일치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고 <아르스비테>를 창간하기 까지 나는 그동안 내가 해온 행동과, 말, 생각들을 하나하나 다시 점검했습니다. 사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불필요한 것들로 넘쳐나나요.
그 과정에서 진정한 나의 생각과 알게 모르게 나에게 주입된 주변의 생각을 분리했습니다. 습관처럼 읊고 다녔지만 내 것이 아닌 것은 버렸습니다. 옷장 속에 있는 알록달록한 옷들의 색상도 몇 가지로 통일시켰습니다. 수첩을 빼곡히 채우던 약속들을 지우고 내게 필요한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했습니다. 한동안 사무실 벽에는 불필요한 말은 하지 말자는 다짐도 써놨습니다. 이 또한 쓰레기를 양산하는 것이니까요.
마음의 빗자루를 들고 내 일상의 구석구석을 쓸고 닦는 청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아르스비테> 4호의 주제는 몸과 마음, 인생의 청소 또는 비움, 그리고 여백의 미학입니다.
우리의 삶은 진정 우리에게 가치 있는 물건들, 시간들, 생각들, 말들로 채워져 있나요? 아니면 낙타가 천막 안으로 처음엔 발 하나, 다리 하나를 밀어 넣듯이 어느새 필요 없는 많은 것들에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내주고 말았나요?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추방하고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들만 남기자는 철학은 전 세계적으로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그동안 세계를 지배해온 물질 만능 주의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번 4호에 실린 글 중에는 집에 쌓인 물건들을 정리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찾게 됐다는 필자들의 스토리와 함께 현대사회의 병인 ‘저장강박증’에 대한 전문가의 진단이 있습니다.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를 줄이고 주거 공간을 최소화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 사람들의 작은집과 돌 하나, 나무 한 그루에도 비움의 철학을 표현하는 일본의 정원, 그리고 노자의 무위 사상과 한국 문학 속의 아름다운 여백에 대해서도 살펴봤습니다. 또한 배 속을 비우는 단식은 단순히 몸을 청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고요함으로 들어가는 문이자 우주의 생명과 소통하는 영적인 경지로 이끌어준다는 국내외 필자들의 체험담을 담았습니다. 이번 호는 특별히 더 많은 여백을 담으려 노력했습니다. 담담한 글뿐 아니라 이미지의 여백을 통해서도 공감할 수 있도록.
동양에서는 비움, 여백, 고요함이라는 단어들이 친숙한 표현입니다. 우리 문화 곳곳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비운다는 것은 단순히 쓸모없는 물건들을 치우는 차원이 아닙니다. 공간뿐 아니라 인간관계 등 삶의 모든 면에서 자연스러운 흐름을 막는 장애물들을 치워야 에너지가 생생하게 작동할 수 있습니다. 청소 또는 비움은 생기를 찾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한 해의 생기가 다시 샘솟는 이 봄에 <아르스비테>는 삶의 미학을 곱씹어보면서 비움과 여백을 위한 청소를 합니다. 우리 삶의 생생함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