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Question "Why?"
베토벤도 모차르트도 영감이 떠오른 순간, 악보를 썼다. 자신의 손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영감으로 악보를 그려가기도 했지 싶다. 모든 작곡가들은 그런 영감을 갈구한다. 음악가뿐만 아니다. 미술가와 시인은 물론 과학자들도 영감에 대한 목마름은 간절하다. 새로운 시장을 만들고, 신제품을 내놓아야 하 는 기업인들도 마찬가지다. 스티브 잡스처럼 새로운 차원을 열어젖히길 꿈꾼다.
대체영감의정체는뭘까.영감은과연어디서오는걸까.스스로풍부한영감을가지 려면어떡해야하는걸까.또영감이뛰어난아이를키우려면어떡해야할까.정말그 런 노하우가, 손에 잡히는 방법이 있기는 한 걸까. 혹자는 “타고난다”고 하고, 또 혹자 는 “키워진다”고 한다. 과연 영감의 뿌리는 어디고, 무엇을 먹고, 어떻게 자라는 걸까. 지구촌은 현재 ‘인터넷과 모바일 혁명’ 중이다. 온갖 정보에 대한 접근과 해석은 갈수 록 편해지고 쉬워진다. 정보의 양에 대한 차별성은 갈수록 줄어든다. 대신 그걸 활용 해서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가가 더 중요해진다. 거기서 ‘통찰력(insight)’이 승부수로 작용한다. 똑같은 사람이나 현상, 흐름을 보더라도 더 깊이, 더 멀리, 더 정확하게 보는 눈이다. 그 눈을 통해 과거를 짚어보고, 현재를 풀이하고, 미래를 내다본다. 그런 힘, 그 통찰력의 뿌리가 영감과 직결돼 있다.
백성호는 중앙일보 문화부에서 종교 담당 기자로 글을 쓰고 있다. 여러 종교 지도자와 수행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조 화로운 삶, 창조적인 삶,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인가에 대해 그 문제를 푸는 첫 단추가 ‘내 안’에 있음을 깨달았다. 최근에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라는 책을 발간하여 행복과 가치에 대한 화두를 독자들과 나누고 있다.
“영감의 생산 공장은 우리의 바깥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 그것을 찾아가는 동력이 바로 ‘왜?’라는 물음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만 영감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다. 인류의 역사는 강물이었다. 줄기차게 흘러왔고, 당대를 살았던 숱한 사람들이 ‘나름의 혁명기’를 살다 갔다. 그때마다 그들도 ‘영감’을 필요로 했다. 영감에 대한 목마름, 그건 인류사를 관통하는 오래된 키워드다. 그래서 오래된, 아주 오래된 인류의 교육법이나 종교적 수행법을 짚어보면 ‘영감의 정체’에 대한 단초를 잡을 수 있다.
그 하나의 예가 유대인의 저녁 식탁이다. 수천 년을 내려오는 유대인 교육법이 여기서 펼쳐진다. 부모는 자녀와 대화를 나눈다. 대화의 형식은 주로 문답이다. 부모는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끝없이 되묻는 역할을 맡는다. 아이들은 날아오는 물음을 받아서 자신의 내면으로 던진다. 곰곰이 생각을 거듭한 뒤 자신의 답을 내놓는다. 그럼 부모는 다시 그 답을 물고 물음을 던진다. 아이들은 다시 내면으로 물음을 담갔다가 답을 꺼낸다. 이게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그 와중에 유대인 자녀의 생각하는 근육은 단련된다. 강하고 질겨진다. 웬만한 한계는 훌쩍훌쩍 뛰어넘을 만큼 근육에 탄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영국 얼스터대와 핀란드 헬싱키대 교수가 185개국의 평균 지능지수를연구해 발표한 자료에는 유대인 국가인 이스라엘의 평균 IQ는 94로 세계 45위다. 반면 한국은 평균 IQ가 106이나 된다. 그럼에도 역대 노벨상 수상자의 40%가 유대인이다. 『더 룰』의 저자 앤드류 J. 서터는 “유대인을 특별하게 만드는 비결은 없다. 다만 세대를 거쳐 계승되는 저녁 식탁의 문화가 있을 뿐이다”고 말했다. 바로 그 ‘저녁 식탁 문화’의 핵심이 묻고 답하기다. 어릴 때부터 그런 방식에 익숙해지면 어떻게 될까. 나중에는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게 된다. 사람을 향해, 일을 향해, 세상을 향해 ‘왜?’ 라는 물음을 던지게 된다. ‘왜?’라는 모든 물음은 뿌리를 향한다. ‘이 일이 왜 생겼을까?’ ‘무엇이 과연 행복일까?’ ‘나는 누구일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런 교육 방식은 단순히 지식을 축적하는 게 아니라 지혜를 생산하는 공장을 짓게 한다. 지혜의 생산 공장, 그건 영감의 원천이다. 유대인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끝없이 묻게 하는 교육 시스템을 구축해놓았다. “영감의 생산 공장은 우리의 바깥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 그것을 찾아가는 동력이 바로 ‘왜?’라는 물음이다.”
인류사를 관통하는 종교적 수행법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동양의 종교든, 서양의 종교든 본질을 놓치지 않는 종교라면 뿌리를 향한다. 그들은 물음을 던진다. 불교의 간화선(화두를 들고 궁리하는 참선법) 수행도, 가톨릭 수도원의 온갖 명상법도, 이
슬람교의 수피즘도, 유대교의 탈무드 토론 등도 마찬가지다. 나의 뿌리, 사람의 뿌리, 세상의 뿌리를 향해 끝없이 물으며 내려간다. 왜 그럴까. 대체 바닥에 무엇이 있기에 그런 걸까. 그렇게 내려가면 무엇과 닿기에 그런 걸까. 학문이든, 종교든, 예술이든 물
음을 통해 계속 내려가다 보면 결국 맞닥뜨리게 되는 궁극적인 질문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닌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다. ‘나’라는 존재의 정체를 묻는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물음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있다. 이 방향으로 갈수록 눈이 열리고 깊어
진다는 사실이다. 통찰력이 커지고 강해진다는 말이다. 그건 자기 안에 있는 ‘영감의 공장’에 점점 더 가까워지기 때문이 아닐까.
태양광을 이용해 돋보기로 종이에 불을 만들 수 있다. 영감의 생산 및 유통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처음에는 돋보기에 초점이 없다. 그런데 종이 위에 돋보기를 대고서 초점을 모은다. 그게 바로 생각의 집중이다. 묻고, 또 묻고, 다시 물을수록 생각의 초점도 모이고 작아진다. 그리고 강해진다. 그렇게 돋보기로 초점을 모으면 점점 뜨거워진다. 사람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어떤 문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점점 더 깊어진다. 나중에는 생각의 초점도 뜨거워진다. 그렇게 모인 뜨거움, 그렇게 모인 에너지가 어느 선을 넘으면 ‘확!’ 하고 불이 붙는다. 그때가 영감이 생산되는 순간이다.
사람들은 “영감은 밖에서 오는 것이다.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한순간 번개처럼 내 머리에 꽂히는 것이다”고 말한다. 그건 영감의 생산 및 유통 과정, 다시 말해 영감이 어떻게 생겨나고 작용하는지를 무시하고 결과만 강조한 것이 아닐까. 영감의 생산 공장은 우리의 바깥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 각자의 내면에 거대한 지혜의 공장, 무한한 영감의 공장이 이미 있기 때문이다. 그걸 찾아가는 동력이 바로 ‘왜?’라는 물음이다. ‘왜?’라고 묻고 골똘히 궁리할수록 그 공장에 점점 더 가까워진다. 덩달아 나의 눈이 열리고, 커지고, 깊어진다. 그게 바로 통찰력이다. 영감을 생산하는 힘이다. 그러니 계속 묻고, 계속 궁리하고, 계속 내려갈 때 우리는 ‘영감이 넘치는 인간’이 된다. 예술가와 수도자, 과학자와 사업가는 물론 우리 모두는 삶에 필요한 영감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