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방식 열 번째 질문 왜 이치는 상반된 개념들로 설명될까?

올 여름 출간을 앞두고 준비 중인 <아르스비테> 5호의 주제는 나무의 지혜다. <아르스비테> 창간 때부터 에디터들과 주제회의를 하면 ‘나무’가 빠짐없이 거론되었다. 항상 주변에  있으면서도 계절마다 새로운 나무는 인간에게 다양한 영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무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검토하면서 우리는 나무가 삶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생각했던 것 보다  많다고 느끼게 되었다. 자연에 순응하면서도 각각의 환경에 맞서 치열하게 생존을 모색하고, 묵묵히 혼자 한 해 한 해 나이테를 늘려가면서도 어우러져 사는 삶의 지혜를 터득한 나무의 상반된 속성들. 인간 삶에 대한 지혜도 이와 같은 상반된 속성들 사이의 어딘가에 있을까.

 

나는 종교인도 종교학자도 아니지만, 많은 종교와 학문이 우주의 이치를 상반된 개념들로 설명해온 것을 항상 흥미롭다고 느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과 색(色)이 그렇다. 공 속에 색이 있고, 무수히 다양한 형태로 펼쳐진 현상계의 본질엔 공이 있다는 이론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보다도 더 알듯 모를 듯 하다. 하지만 공과 색은 변하지 않는 우주의 본질이면서도 시시각각 변하는 현상계를 설명하기 위한 얼마나 세련된 장치인가. 동양에서 말하는 음(陰)과 양(陽)도, 힌두교의 창조와 파괴의 신도 상반된 개념들을 통해 모든 것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운동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생명 속에서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읽고, 사라져가는 것 안에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볼 때 삶에 대한 시야가 넓어진다. 그 모든 것이 결국은 하나임을 알게 되기에.

 

상반된 개념들 중에서도 내가 특별히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것은 사람의 아들이자 신의 아들이라는 개념이다. 이 얼마나 멋지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가. 물론 신과 인간 사이에 생명이 탄생하는 설정은 기독교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등장 이전 그리스 로마 신화에도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몸을 빌려 태어나 나이 서른까지는 평범한 인간의 삶을 살다가 신의 아들로 세상을 떠나는 예수의 삶은 인간 안에 존재하는 지극히 물질적이자 동시에 지극히 영적인 속성들에 대한 강렬하면서도 아름다운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하루에도 우리는 이 두 극단 사이를 수도 없이 오가지 않나.

 

외국에서 실시한 한 실험에서 남성들의 땀 냄새가 묻은 티셔츠를 여성들에게 주니 상대방을 보지 않고도 자신의 유전자적 성향과 정반대의 남성을 골라냈다고 한다. 몸에 입력된 유전자 정보는 생존과 종족 번식을 위해 가장 적합한 상대를 찾아간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는 유전자의 번식의 역사일 뿐이라는 극단적 물질주의 관점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대목이다. 그러나 역사의 페이지는 이에 못지 않게 믿음을 위해 순교하거나 종족 번식의 본능을 외면한 채 오로지 깨달음의 길을 홀로 걸은 사람들의 이야기들로도 가득하다. 우리는 동물적 본능의 노예이기도 하지만 한 없이 숭고하기도 하다. 셰익스피어 비극의 등장인물들처럼 어리석
기도 하지만, 이 주옥 같은 작품들을 쓸 수 있는 신의 감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삶이 처절하면서도 아름다운 것은 삶도, 사람도 이처럼 모순되고 대립적인 것 같은 속성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동물과 신의 속성을 꿰뚫어 그 본질이 하나의 전체로 보일 때 우리
는 사람의 아들에서 신의 아들로 한걸음 다가가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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